가족 이야기

며느리의 기쁜 울음

master 42 2017. 12. 13. 22:55


남미 배낭여행  남미 최남단 비글해협     - 2009, 02, 28 -

찰스 다윈은 연구를 위해 세계를 다녔다. 찰스 다윈이 연구를 위해 이곳을 지날때 

탑승했던 배의 이름이 비글호였던 것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오늘 점심을 먹고 엊그제 주문했던 레이저, 절곡 부품을 찾기위해 거래처 문앞에 주차를 하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주차를 시키고 전화를 받으니 "아버님, 합격했어요!" 며느리의 울음이 그득한 기쁨에 찬 소리가 내 귓전을 울렸다.

인터넷으로 손자의 수시전형 합격을 확인하고 내게로 먼저 전화한것 같다.

엄마로서 1년을 마음조리며, 그리고 수능연기라는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참아왔던 환호였을것이다.

며느리는 유달리 아이들에 대해서 강한 애착을 갖고있다. 


대학을 졸업하던 그해 24살 가을에 시집와서 지금까지 아들, 딸 낳아 열심히 키웠다.

그때 내 아들이 레지던트 2년차 였으니 모두 철없는 시절에 철들어가며 첫 아들을 낳아 군의관이된 남편따라 백령도

최전방으로 따라가서 첫 아들(손자)의 백일, 돐도 그곳에서 보냈다.

백령도에 있는 해병대 장교관사는 그 당시만 해도 안스러울 정도였다. 겨울이면 추위를 막기위해 벽안팍으로 

비닐을 쳐 외풍을 막았고, 아침이면 그 비닐표면을 따라 습기가 물방울되어 흘러내렸다 하니 엄청 힘든 신혼을 보냈다.


그 이듬해, 서울에 있던 시누이(딸)를 시집 보내기위해 아들을 친정 엄마한테 1주일간 봐 달라고 하고 서울로 나와 

생일이 며느리 보다 6개월 늦은, 친구같은 시누이 데리고 결혼준비물을 마련하러 발이 닳도록 다녔다고 한다.

또 시부모 되실분들을 모시고 한복집으로 다니고, 예단을 준비하러 몸이 성치않은 시어머니를 대신해서 다녔다.

서울에서 딸아이 결혼 준비하면서 내게 했던 말은 "아버님, 돈만 준비해 주세요, 아가씨 결혼준비는 제가 다 하겠습니다"

딸아이 시집가기 3일전, 모든 예물을 준비해 두고 나는 며느리가 시키는데로 붓으로 화선지에 받을분의 호칭을 썼다.

그리고 며느리는 예물을 화선지에 정성드려 곱게싸서 넣고, 그 위에 카이네션 한송이씩을 올려놓고 정성드려 포장했다.

딸아이가 신혼여행 다녀오고 모인 가족들 앞에 이렇게 말했다. "난 나를 시집 보내준 언니의 은혜를 평생 잊지않을거다"


군의관 남편이 백령도 근무가 끝나고 마산으로 옮겨 살때 딸(손녀)을 낳았고, 그 이듬해 마산에서 돐잔치를 했다.

백령도에서 손자의 돐잔치를 못해줬기에 손녀의 돐잔치와 겸해서 가족, 친지를 모시고 돐잔치를 했다.

사돈과 사부인도 자리하신 그 자리에서 나는 며느리가 시부모를 대신해서 친구같은 시누이 시집 보냈던 이야기를 

하며 사돈 내외분께 잘 키운 따님을 며느리로 보내 주신데 대해 감사의 말씀을 드렸다.

그후 제대한 아들 내외는 울산을 거쳐 포항에서 개업하게되고 지금 까지 그곳에서 정들이며 살고있다.

난 아들이 의과대학에 입학했을때(1990) 아들의 개업자금을 준비하기 위해 1억 10년 적금을 들었다.

아들이 개업할때 그 돈을 줄려고 하니 아들과 며느리가 자기들도 미리 준비했다며 거절했다. 


아들이 포항에서 병원을 개업하고, 며느리는 두 아이 엄마로 열심히 아이 키우고 남편 병원 돌보며 살고있다.

손자는 초등학교를 다니며 엄마가 시키는 공부외에도 운동, 특히 축구에 재미를 부쳐 친구들과 축구를 즐겼다.

내가 포항 아들집에 가면 손자는 자주 나를 데리고 바깥에서 축구공을 갖고 놀며 발재주를 자랑삼아 보여줬다.

초등학교 5학년 여름방학때 엄마가 아들(5학년), 딸(2학년) 데리고 카나다 뱅쿠버로 두달 어학연수를 가게되고, 

손자는 그곳에서 동네 외국 아이들과 어울려 땀흘려가며 축구를 즐겼다.

그곳 아이들이 볼때는 손자는 축구를 엄청 잘 하는 한국 아이로 인정받고 언제나 그들의 주전선수가 되었다.

또 고등학교때는 농구를 좋아해서 학급대표로 활약하게되고, 어느날은 발목을 다치기도 했다.


손자는 숫기가 별로없는 우리 가족과는 달리 초등학교때 부터 남들앞에 나서기를 좋아했다.

아마 정치활동을 좋아 하시는 외할아버지를 닮았다고 모두들 이야기 한다. 그래서 그런지 초등학교때 부터 고등학교 까지

반장을 하며 또 그것을 즐겼다. 그러니 반 친구들로 부터 왕따를 당한다거나 폭행을 당하는 일은 지금 까지 없었다.

늘 손자옆에 친구들이 많아 그들과 잘 어울려 지냈다. 

엄마는 학부형 모임에 가면 언제나 제일 젊은 엄마였고, 항상 잔 심부름을 마다하고 잘 했다.


나는 지난 11월 14일 부모님 산소앞에서 손자가 시험을 무사히 치루도록 해 달라며 부모님께 빌었다.

뒤에 들은 이야기로는 아들, 며느리도 수능시험전에 외할아버지, 외할머니 산소에 가서 빌었다고 했다.

난 15일 아침 비행기로 파키스탄으로 출장 떠났다. 떠나면서 인천공항에 휴대폰을 두고 갔었던 이야기는 지난번에 포스팅했다.

카라치에서 업무를 보면서도 손자가 시험을 잘 봤는지 엄청 궁금했지만 며느리 한테 조심스러워 전화하지 않었다.

사흘이 지난 아침에 시차 때문에 일찍 일어나 테블릿피시를 와이파이에 연결해서 인터넷을 보는데 수능이 연기되었다는 

기사를 읽고 얼른 검색해 보니 포항에서 크게 지진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수능이 연기되었다는 기사였다.

얼른 며느리 한테 전화하니 예비소집이 아수라장이 되었다고 하며 손자의 수능이 걱정된다고 했다.


그리고 나는 손자가 수능시험을 다 치고 난후 귀국했다. 공항에서 대구로 내려오며 아들한테 전화했더니 

손자는 수능시험을 별로 잘 보지 못했다고 했다.

그후 수시모집 두어곳에 응시한다며 며느리는 걱정을 많이 하고 있는듯 했다.

난 그냥 아무런 말도 못하고 그냥 있을수 밖에 없었다.

그런데 오늘 낮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그 기쁨은 이루 말 할수 없다.

손자가 내게 큰 효도를 한것 같다. 손자는 친가, 외가 모두에게 큰 년말 선물을 주었다.

요양원에 있는 아내한테 전화했더니 엄청 기쁘다며 평소보다 더 활기찬 목소리로 "그넘 참 장하다"라고 했다.


그 기쁜 소식을 듣고보니 1989년 내 아들이 대학입학 예비고사를 치뤘던 그해 이맘때가 생각난다.

예비고사를 마친 아들이 집에 오지않고 외갓집에 있다고 장모님이 내게 전화했다.

예비고사 시험을 잘 못 봤다며 외할머니옆이 편해서 외갓집으로 바로 갔었단다.

그런데 의과대학에 합격했으니 그때 우리 가족들은 물론이고 외갓집 모두 잔치 분위기 였다.

오늘 손자가 합격했으니 아들에 이어 손자대에 까지 의사가 되게되었다.

내 장모님은 살아계실때 경노당에서 가장 행복한 노인으로 칭송받고 당당하게 지내셨다.

장모님은 아들, 손자내외, 사위, 외손자, 두 남동생 7명이 의사였는데 이제는 8명이 될것 같다.


그동안 아들은 물론이지만 며느리가 정말 고생했다. 

그리고 손자, 너 정말 고생했다. 


이제 훨훨 날아라.....



- 이 이야기를 쓰면서 자식자랑하는 팔불출이 되어 많이 민망함을 느낍니다. 죄송 합니다 -


2018. 02. 02, 오후 5시경 며느리한테서 전화를 받었다.

환한 웃음을 머금은 목소리였다.

"아버님, 시헌이가 의예과에 일등(Top)으로 합격했다고 합니다."

세상 모든것이 환하게 보였다. 

내 생애 최고의 날인것 같다.



        

     남미 배낭여행  남미 최남단 비글해협     - 2009, 02, 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