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한국

내 고향 동곡 가는길-엄마의 따스한 손길을 느끼며...

master 42 2008. 10. 28. 10:50
39336 
 
 문양에서 동곡 용두고개로 가는길 옛길-지금은 포장되어있다.-이 길을 걸어서 대구로 왔다.
일요일(10/26), 나는 대구 반고개에서 고향 동곡 까지 50리(20km)를 걸었다.
60년전 1948년, 가을 걷이가 끝난 가을에 코흘리게인 7살의 나는 엄마손을 꼬옥 잡고 
고향 동곡 우미기 언덕받이 오두막집을 떠나 대구로 걸어서 들어왔다.
엄마 나이 49살이셨으니 내 지금의 나이보다 훨씬 젊을때였다. 
어머님의 젊은 시절은 일본에서 고생하며 다 보내셨다.
대구로 가는 길이 이사를 한다는 사실을 알지도 못했기에 동네 동무들과 이별의 
나눔도 없었고, 고향집 떠나는 마음의 각오도 없었다.
일본에서 태어나 해방되던해(4살) 6월에 고향 동곡으로 돌아와 3년을 살았지만 너무 
어린시절이라 지금 까지 기억되는 것이 별로 많지 않다.
일본에서 메리야스공장에서 일하셨던 아버지는 귀국하셔서 농사일을 하시면서 농한기
겨울에는 고모집의 방 한칸을 빌려 요꼬(횡편기)를 열심히 흔들어 셔츠를 만들어 
동곡에서 가까운 5일장을 다니시며 돈을 모으셨던 기억이 난다.
어느해 겨울, 아마 몹씨 추운날에 아버지는 멀리 장사를 가셨던지 늦게 돌아오셨다.
신작로 길가에서 나를 안고 아버지를 기다리시던 어머님과 작은형님이 너무 추워 
집으로 들어와 있는데 아버지가 돌아오셔서 화를 내시며 꾸중을 하셨던 기억도 난다.
매사에 열심히 일하셨고 젊은 시절 일본에서 익혔던 메리야스공장을 하고 싶으셨던
아버지는 몇년간 모으셨던 돈으로 대구로 이사를 결심하셨던지 같은 동네에서 기와집을 
짖고 살으셨던 진외가의 집을 사서 그해 여름 그 집을 뜯어서 대구로 옮겨 지으셨다.
늦가을 엄마손을 잡고 용두고개를 넘어 문양 마을앞을 지나 다사로 넘어가는 돌고개를 
넘어오며 엄마는 돌탑에 돌을 몇개 올려놓으셨다.
내가 커서 엄마한테 물으니 돌탑에 돌을 얹어 놓으면 고향으로 다시 돌아온단다고 하셨다.
  
내당동 옛 집터-지금은 빌딩이 서 있다. 한의원과 병원터가 40여년을 살었던 집터다. 

 반고개에서 내려다본 대구시내 방향

 

강창에서 나룻배를 타고 강을건너 거기서 부터 그 당시는 대구에서는 변두리였던 반고개 까지는 마차를 타고 왔다.

마차에서 내리니 아버지가 마중을 나와서 우리를 데리고 짓고 있는 집으로 왔다.

그러나 집이 완성되지 않아 한달 가까이 이웃집 방한칸을 빌려 살았던 기억이 난다.

붉은 황토흙이 깔린 집터라는 기억이 나고 벽체도 황토로 발랐던 기억이 난다.

물론 담장도 황토벽돌로 쌓였던 기억이다.

아버지가 지은 이 기와집에서 1990년 남의 손으로 넘어갈때 까지 나는 이곳에서 학교도다니고 결혼도 했으며

작은방 한켠에서 신혼 생활도 했다.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큰 형님이 이 집에서 돌아가셨다.

 

엄마손을 잡고 고향집을 떠난 60년이 되는해에 꼭 반고개 살던 집에서 고향까지 걷고 싶은 마음을 몇년전 부터 갖고 있었다.

올 봄에 벗꽃이 문양 돌고개에 흐드러지게 피었던날 차로 돌아보며 옛길을 더듬어현지 답사도 미리해뒀다.

 

2008,10/26, 09:20 반고개를 출발하여 동곡으로 출발한다.

같이 등산하는 후배 S와 성주가 고향인 그의 부인 P여사가 동행해 주고 말동무 되주어 한결 덜 지루하다.

다사 까지는 옛길의 흔적은 남아있지만 8차선의 포장길이 주욱 뻗어있다.

고개를 넘으면 그 당시만 해도 논밭속에 그렇게 커 보이던 "애락원"은 쇠락해큰 건물에 쌓여 한켠으로 숨어 보인다.

큰 감삼못이 있던 자리는 메워져 청구 아파트가 지어지면서 새로운 타운이 형성되었고,

붉은 벽돌을 굽던 벽돌공장 자리에는 신흥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어릴때 오를때 마다 높게 느껴지던 두류산엔 대구타워가 높게 솟아있다.

죽전네거리를 지나 한시간여를 걸어 오랜동안 50사단이 있던 용산에 도착한다.(10:20)

지하철역과 홈프러스가 있고 아파트 단지와 상가들이 큰 타운을 형성하고 있다.

 

 감삼못이 있었던 곳-7호광장, 청구 아파트로 새로운 타운이 형성

옛 50사단이 주둔해 있던 용산지구-지하철, 홈프러스, 롯테APT, 상가들로 형성된 새로운 타운 

 

이곳에서 간단히 먹을 거리와 물을 사고 다시 출발하여 성서초등학교앞을 지난다.

이곳은 중학교 다닐때 친구 A가 살던곳이다.

개구리 소년들로 유명해진 와룡산이 뒤로 펼쳐져 있고 넓디넓은 가무네 들판이 가물가물해 보이던 그곳에

성서공단이 들어서서 한때는 활발했으나 요즘은 경기가 침체된듯해 보인다.

 

 성서 초등학교-뒤편으로 와룡산이 있다. 영원히 미궁으로 빠진 개구리 소년으로 유명하다.

 

 성서공단 네거리에서 바라본 와룡산-빌딩숲에 가리워져 있다.

 

 

한시간여를 걸어 도착한곳은 신당동 네거리에 있는 계명대학교 앞이다.(11:20)

계명대학교가 이곳으로 캠퍼스를 옮기고 이곳도 새로운 타운이 형성되고있다.

사과밭을 했던 친구가 밭을 팔아 40여억원을 받아 지금은 시내 한가운데 빌딩을 사서 임대업을 한다.

그러나 땅을 팔고나서 형제간에 재산분배 때문에 한동안집안이 시끄럽더니

드디어는 형제간에 불화로 집안이 조각났다고 한다.

 

 계명대학교-대명동 캠퍼스에서 옮겨왔다.

 

 강창 다리밑에 있는 어느 집마당-마늘 까기에 힘을 합친다.

 

 

12시가 지나며 강창다리를 넘어간다.다리 건너기전에 산아래 아담하던 마을은 아파트 단지로 변했다.

대나무숲과 물들어가는 가을 단풍에 둘러쌓여있는 이호(伊浩)서당이 더욱 외로워 보인다.

대구의 하수도라 불리던 신천과 금호강물이 정화되어 흐르니 금호강도 이제는 많이 맑아져 보인다.

수초도, 이끼도 보인다.

 

 이호서당(伊浩書堂)-아직도 학동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리는듯 하다.

 

강창교에서 바라본 금호강-신천 정화로 맑은물이 흐른다. 

 

 

 강창교-새로운 다리를 건설중이고, 새로운 도로도 ....

6.25때 부터 세번 목재다리가 놓였으나 홍수에 떠내려가 버리고 나룻배로 강을건너다가 1960대 중반에 콘크리트 다리가 세워졌다.

지금은 다사 죽곡 주택단지 개발로 교통량이 불어 또 새로운 다리를 놓고있다.
강창교가 보이기 시작하면서 다사고개가 멀리로 아물거리더니 다리를 건너니

다사고개 오르는 양옆으로 죽곡 마을에 새로운 타운이 형성되고있다.
봄철이면 죽곡마을 뒤산아래 복사꽃이 아름답게 피었던 기억이 난다.
왼쪽으로 돌아가면 강정 상수도가 있고 한때는 번성했던 매운탕집들이 이제는
쇠퇴해 가는 경기를 실감하고 있다.
이곳에서 후배 S는 예식장에 가야 한다며 지하철로 돌아간다.

다사 죽고 주택단지가 한창 건설중이다.

 

 다사고개에서 내려다본 강창방향

 

 다사고개 옛길

 

 다사고개에서 내려다 본 매곡마을-멀리로 문양 넘어가는 돌고개가 보여야 하는데...

 

 

다사고개(매곡사거리)에 올라서면 확트인 시야에 멀리로 문양으로 넘어가는 돌고개가 보여야 하는데

아파트에 막혀 끊어진 산능선만이 보인다.
아늑해 보였던 마을은 아파트와 집들로 빼곡히 차있다.
돌고개로 들어서니 수확끝난 논에서 이삭줍는 할머니를 만난다.
그 옛날 이 고개를 넘을때는 오솔길이었는데 지금은 두대의 차가 넉넉히
넘어갈 수 있는 포장길로 변했다.
돌고개에 오르니 두개의 돌탑이 있다.
나도 다시 이길을 넘을수 있도록 기원하며 돌을 얹어본다.

 지난봄 문양 넘어가는 돌고개에 핀 벗꽃

 

 

돌고개를 넘으니 문양 부곡마을이 눈아래 넓게 펼쳐저 있다.

아직도 수확을 남겨둔 누런 들판이 내려다 보인다.

이곳 문양 부곡 마을은 언제 부터인가 메기매운탕으로 유명해졌다.

문양으로 대구 지하철 기지가 들어서고 부터 더욱 활발해 지고있다.

대구지하철기지가 본래는 내 고향 동곡, 하산동으로 계획되었으나 보상금을 더 올려보겠다며 반대했던

여론에 문양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매곡마을에서 돌고개 올라가는 길

 

 오랫만에 이삭 줍는 모습을 본다.

  

 

 

동고개에서 내려다 본 매곡마을 

  

 나도 돌 하나 얹어놓는다-다시 이 길을 걷고싶어서...

 

 돌고개에서 본 문양마을-지하철 역사

  

 문양 부곡리 메기매운탕 단지로 유명하다.

 

 

이곳 문양에는 내게는 16대 할아버지 되시는 전양군의 추모묘비가 있다.

평안도 병마절도사이셨던 할아버지가 이시애의 난을 평정하고 임금님에게서 전양군을 하사 받으셨다.

이곳을 둘러보고 매운탕집에서 한시간 동안 느긋하게 점심을 먹는다.(13:20~14:20).

 

 16대 할아버지 전양군 공적 추모묘비

 

 

 문양 마을의 아직도 남아있는 고택

 

 

 문양에서 동곡으로 가는 마지막 고갯길 용두고개로 가는 옛길-포장되어 있다. 이 길을 걸어서 대구로 갔다.

 

 

이제 남은길은 용두고개만 넘으면 된다.

길을 물으니 30여분 걸리다고 한다.여기서도 옛길을 따라 산아랫길로 간다.

그러나 옛날의 소릿길이 아니라 차한대가 넉넉히 다닐수있는 포장된 길이다.

한때는 시원한 그늘이 되어주던 소나무숲도 지금은 출입금지 간판이 걸려있다.
한때 작은형님이 낚시했던 문양못이 유료 낙시터로 간판을 내걸고 있다.

  

 용두고개에서 내려다 본 동곡마을-왼쪽은 삼태동, 오른쪽은 우미기

 

 

 

 

 동곡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하빈, 왜관으로, 왼쪽으로 가면 성주로 가는 삼거리-멀리로 나의 옛날집터가 보인다.

 

 

용두고개에는 내가 중,고등학교때 까지 대장간이 있었던 기억이 난다.

지금은 2층 양옥집 하나가 덩그러니 서있다.

고개에 올라서니 내 고향 동곡 우미기와 삼태동 마을이 훤히 보인다.

내가 살었던 오두막집을 헐고 새롭게 지은 집이 내 눈안으로 훅 들어온다.

오후 3시가 조금넘어 내 고향집앞에 도착한다.

그집 아들과 몇마디 이야기 하다가 돌아서 나와 동곡시장안에 있는할매국수집에 도착하니 3시10분이다.

약 6시간 걸려 도착한다.

 

해방후 3년간 살었던 옛 오두막집-지금은 새집이 들어서 있다.-왼쪽에 집이 있었는데 몇년전에 허물었단다.

 

6시간 동안 걸어온 길은 옛길을 찾아 걸었건만 옛길이 아니고 몰라볼 정도로 변한곳도 많다.

인심도 조금은 변한듯 하다.

문양에서 내 16대 할아버지 묘비석을 찾아들어가는 길을 몰라 남의집 마당을 거쳐 갈려니

주인이 화를 내며 100여m 아래에 있는 길로 가라고 역정을 낸다.

 

종종 찾아왔던 고향이지만 그 옛날에는 우리들 집안(全義李) 집성촌이었는데 객지로 많이 떠나살고

외지에서 많이 옮겨와 이제는 몇분의 친척만 살뿐이다.

그래도 어릴때 부터 알고지내던 형님뻘 되시는 어르신네 몇분이 아직도 고향을 지키고 있다.

역시 어느 시골과 다름없이 젊은 사람들이 적고 노인이 많아 보인다.

 

동곡초등학교는 이제는 학생들이 많이 줄어 6학년이 되면 한반정원도 되지 않는다고 한다.

내가 결혼하고 셋방과 전세집을 오가다 10년만(1980년)에 집을 샀을때 어머님이 오셔서 내게

30만원을 주시며 결혼할때 숫가락 하나 마련해 주지 못했는데 이 돈으로 가구 하나 장만하라며

오랜동안 모은 용돈을 주고 가셨다.

난 이 돈을 쓸수가 없어서 18년 갖고 있다가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동곡초등학교 교장을 만나

300만원을 만들어 어머님 뜻으로 장학금을 주고 싶다고 하니 정중히 거절한다.

 

고학년으로 올라오며 대부분 대구로 가버리고 남은 학생들은 십여만원의 장학금 명목은 별로

돈같이 생각하지 않는다고 했다. 또 국가에서 컴퓨터 같은 기자재를 충분히 공급해 주어  돈이

필요없다고 한다.

난 어머님이 주셨던 돈 30만원의 10배인 300만원을 시집온 며느리에게 주면서 가구를 사던지

아니면 너도 며느리 맞이할때 10배로 올려서 전해 주던지 하라며 주었다.

 

또 고향이 옛날에는 달성군이었는데 지금은 대구 광역시가 되어 부동산붐이 한때를 휩쓴적도 있다.

그 옛날에는 걸어서 다니다가 차가 타드래도 대구 가는길은 하룻길이었다.

요즘은 동곡시장에 있는 토속음식점 할매 칼국수집에 사람들이 많이 오는데 대구에서 30분 거리란다.

내가 중학교때 추석에 고향 왔다가 차가 없어서 강창 까지 걸어갔던 기억이 난다.

강창에서 나룻배를 탈때 건너편에서 막걸리 마시고 있는 사공을 큰소리로 불러 타고간적도 있고,

결빙된 강을 걸어서 건너도 사공은 도강료를 꼭 받아 챙겼다.

 

다사고개로 올라가는 왼쪽편 죽곡 마을에 봄이면 복사꽃이 흐드러지게 핀다.

그곳 마을로 시집간 한동네에서 자란 고종사촌 누님이 어느날 젊은 나이에 죽었다고 했을때

누나나 여동생 없이 막내로 커온 난 무척 슬퍼했다.

성서초등학교앞에 중학교 동창이 살았는데 고등학교때 그 친구가 형수님이라며 소개해 주는

우아한 분을 보고 한동안 그 친구집엘 자주 드나들었던 기억도 난다.

 해방후 3년간 농사 지었던 논이 있었던 곳에 작은 공원이 들어서 있다.

 

도착하니 배낭여행 친구 Y와 C, 그리고 아들 내외와 손자, 손녀가 환영해 준다.

국수집에서 추억을 즐기며 간단히 막걸리잔을 기울인다.

그전부터 알고지내던 동네 어른분들 한테도 고기와 술을 대접하니 반가워하신다.

60년만에 따스했던 엄마손의 잔잔한 추억을 더듬어 걸었던 하루가 내 평생 기억에 남을것 같다.

 

같이 동행해 주며 말동무 해준 후배 S와 부인 P여사에게 감사를 드린다.

즐거운 하루였다. 

 

'여행-한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산동 산수유 마을 봄 나들이  (0) 2011.04.05
마지막 꽃잎을 잡고...북천 코스모스꽃 축제  (0) 2008.10.07
남해 나들이...  (0) 2008.04.15
3월 초하룻날....대왕암 소묘  (0) 2008.04.07
산수유 마을 잔영  (0) 2007.1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