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이야기

큰형님이 생각난다.

master 42 2005. 4. 5. 22:12


산소 언저리에 돋아나는 새잎
오늘 한식날이라 산소엘 다녀왔다.
대구에서 50리로 가까운 거리라 종조카와 같이 일찍 출발했다.
나야 시간에 그리 쫓기지 않지만 식당을 하는 조카가 일찍 다녀오자 하여 서둘렀더니
9시쯤 성묘를 끝내고 조상님들 묘소앞에 앉아서 조카의 힘들게 살아가는 이야기를 듣는다.
얼마전에 15년동안 식물인간으로 살다가 저 세상으로 간 형을 돌보느라 집안이 풍비박산이
났던터라 그 고통을 질부와 고스란히 안으며 말없이 살아왔던 조카다.
또 부모가 건강이 좋지를 않아 병원 응급차를 밥먹듯이 불러서 자주 비상이 걸리니 하루라도
편안히 발뻗고 잘날이 없다고 한다.
그래도 오늘 오랫만에 조상묘 앞에서 성묘를 하고나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고 하며 매년 
같이 성묘를 를 오자고 한다.
조카를 먼저 대구로 돌려 보내고 올때 메고온 카메라로 산소 주위를 둘러봤지만 봄이 
늦은지 핀 야생화들이 보이지를 않는다.
산소를 내려와 성주가는 길로 차를 몰아 성주대교 아래로 내려가 넓은 낙동강을 몇컷 담아본다.
긴 성주대교를 바라보노라니 돌아가신 큰 형님이 불현듯 생각난다.

낙동강 모래에 심은 보리
나보다도 19살이나 위셨던 큰형님은 나에게는 아버지나 다름없는 형님이셨다.
훤칠한 키에 미남이셨던 형님은 항상 책을 손에서 놓지를 않으셨다.
일본에서 국민학교만 졸업하고 돈이 없어서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했고 읽을책을 
살수가 없으니 서점을 돌며 책을 읽었다고 한다. 
점심시간에는 가까운 공원에서 도시락을 먹었다 한다.
그러다가 독립운동 하던 대학생들과 공원에서 만나 독립에 대한 이야기들을 했다.
그러다가 대학생들이 경찰에 잡혀 가는 바람에 형님도 투옥 당하셨다.
2년간 복역 하시다가 해방이 되어 풀려 나오셨다.
귀국하여 면서기 시험에 합격하여 군청에서 사무를 본적도 있다.
아버지가 하시던 가내공업을 작은형님과 같이 삼부자가 주야로 하시다가 
6.25가 일어났다.
아버지는 우선 작은형님이 징집 나이가 되니 피난겸해서 고모가가 있는 
성주로 피난을 보냈다.
피난이 아니라 대구보다 피난간 성주가 먼저 적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매일을 토굴속에서 살았다고 작은 형님은 그때를 회상하신다.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되어 인민군이 후퇴할즈음 큰형님은 제일 먼저 성주에 
피난간 동생을 찾아나섰다.

성묘객 차들로 붐비는 성주대교-옛날엔 나룻배로 건넜다.
지금의 성주대교는 그때는 없었고 나룻배로 건너던 시절이었는데 인민군이 막 
후퇴를 했기에 나룻배 조차 없어서 형님은 옷을 벗어 머리위로 치켜들고 낙동강을 
건넜다고 한다.
흐르는 낙동강물을 가로질러 건널때는 오직 동생의 안위가 걱정되어 다른 
아무것도 보이는게 없었다고 그후 형님이 내게 들려 주셨다.
물이 목까지 차서 낮은 물길목을 찾는데 여러번 시도를 하여 건너는데 
성공했다고 한다.
강을 건너 두어시간 가는동안 길 양옆에 죽은 인민군들의 시체를 여럿 
보았다고 한다.
고모가가 있는 산골 마을에 어떻게 달려왔는지를 모르게 도착하니 온몸이 
땀에 젖었다고 한다.
오직 동생의 안위만이 머리속에 꽉 차있었다고 한다.
작은형님은 무사했다.
얼마나 반가웠겠는가!
큰형님은 20대 후반, 작은형님은 20대 중반이었을때니 형제애가 남달렀을 것이다.
큰형님이 살아계셨을때 그때의 이야기를 하며 형제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으켜 주셨다.
난 그당시 국민학교 2학년이었으니 철없이 뛰놀던 때였다.
내게는 큰형님은 아버지 같은 존재였으며 지금 까지도 내가 가장 존경하는 분이시다.
큰형님 산소에서 술한잔 붓고 머리숙여 절 할때 마다 나는 항상 미소를 띄우는 
형님을 생각한다.

전쟁의 상흔을 아는지 모르는지 낙동강은 흐른다.
돌아오는길에 성주 수박, 참외로 유명한 비닐하우스로 덮인 들녁을 돌아보고
지방문화재인 하목정(霞牧亭)을 찾아간다.
하목정(霞牧亭)은 나의 집안 全義李氏 선대조의 얼이 서린 유서깊은 곳이다.
하목정에 대한 내용을 간추려 올려 본다.


하목정(霞牧亭)
" 이 건물은 임진왜란때 의병장이었던 낙포 이종문 현감이 조선 선조37년(1604)에 
세운것 이다. 
인조가 왕위에 오르기전 이곳에 머문적이 있어 그후 이종문의 장자인 이지영에게 
『하목정(霞牧亭)』이라는 정호를 써 주었으며 또한 사가에서는 서까래 위에 부연을 
달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나 인조의 명으로 부연을 달았다고 한다. 
사랑채로 이용하는 이 정자는 평면이 정자형처럼 되어 있어 특이하며 처마곡선도 
부채모양의 곡선으로 안허리 곡선의 반대현상을 보이고 있으며, 특이한 팔짝지붕의 
건물이다. 
내부에는 김명석, 남용익 등 많은 명인들의 시액이 걸려 있다. 
하목정은 정면이 4칸이고 측면이 2칸 규모이나 향우단 1칸에는 전면으로 누 1칸이 
첨가되고 후면으로 방1칸이 더 생겨서 집전체 모양이 丁자처럼 되었다. "

오랫만에 하목정을 둘러보니 지방문화재라 그런지 관리상태가 부실하게 보인다.
일부 건물을 수리중이나 전체가 너무 낡아 보여서 후손의 입장에서 가슴 아프다.
돌아오는 길이 성묘객들로 붐벼 제법 도로가 복잡하다.
따뜻한 봄날, 한식날 성묘를 마치고 돌아오니 마음은 가뿐하다.

성주 수박, 참외를 재배하는 비닐하우스 들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