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 이야기

대구 금달래 이야기

master 42 2006. 9. 11. 13:12

대구에서 오래 살고 있는 사람(65세 이상)들중에 금달래라는 미친 
여자를 기억 하는 사람들이 꽤나 있을것이다. 
내가 국민학교 다닐때 대신동 서문시장 근방에서 몇번 봤던 기억이 있다.
나이든 어른들이 싸다니기를 좋아하고 옷을 매무세 입게 입지않고 
다니는 여자를 일컬어 지금도 "금달래년" 같다고 한다.
지방에서 대구로 일보러 왔다가 돌아가면 친구들이 "자네 대구 금달래 
보고 왔는가?"하고 물었을때 "못봤는데" 하면 대구 가지 않고 거짓말 
한다며 놀렸다고 할 정도였다.
금달래에 대한 이야기는 대구 달성공원 앞에 노닐고 계시는 나이든 어르신들 기억과
대신동에서 오랫동안 살고 계셨던 친구 장모님 한테서 들은 금달래에 대한 이야기와
또 그 당시 대신동에 살었던 친구들의 생생한 기억들을 모아 이 글을 쓴다.
지난번 낙동정맥 종주때 어느 등산로 입구에 치렁치렁하게 많이 걸어놓은 
시그날을 보고 내가 "금달래 치맛자락" 같다고 했더니 후배가 "형님, 금달래
가 뭡니까?" 하고 물어서 대강 얼버무렸지만 확실한 대답이 아닌것 같아서
몇몇 사람들 한테 물어봐도 기억은 있지만 상세히는 모른다고 하며 어망(멍) 
해서 미친 여자라고 한다. 
"어망하다"가 뭐냐고 물으니 아마 색을 좋아하는 뜻일거란다.
"어망하다"라는 말을 사전에 찾아봤지만 그 뜻이 없어서 국어학자에게 물어
봤더니 "의뭉하다"와 비슷하지 않겠나 한다.
(의뭉하다:겉으로는 어리석은것 같으나 속은 엉큼하다)
금달래의 성에 대해서는 금씨인지 아닌지 잘 모른다고 한다.
아마 중인 집안의 여자로 상당히 예쁜 미모를 갖추었다고 한다.
나이가 들어 시집을 갔는데 원래 부터 병적으로 색(色)을 좋아했던지 남편과 
맨날 방안에서 어우러져 딩구니 시어머니가 보다못해 친정에 가서 좀 있다가 
오라며 친정으로 보낸다.
시집가서 소박맞고 친정에 온 딸을 친정 식구들이 대문에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며 그집 귀신이 되라며 다시 돌려 보낸다.
오갈데 없이 쫓겨난 이 여자는 대구 시내를 돌아다니며 원래 부터의 천성인 색기로
동가숙 서가식 하며 여러 남자와 잠을 자며 지내다 어느날 서문시장 다시마 가공 
공장에 취직하여 일하게 되나 곧 임신하게 되고 아비도 모르는 아이를 낳는다.
이때가 1940년초 였다고 한다.
그러나 일정한 집이 없던터라 아이가 죽게되고 그 충격에 미치게 되었다고 한다.
전하는 말로는 금달래는 죽은 아이를 안고 며칠간 대신동 일대를 울부짖으며 
돌아 다녔다고 한다. 아이를 잃은 어미의 찢어지는 아픔을 절규했지 싶다.
미치고 나서 대신동과 서문시장 일대를 남루한 몰골로 배회하니 어른 아이 할것 
없이 많은사람들 한테 조롱을 당했다고 한다.
그때 부터 이 미친여자를 금달래라 불렀다 한다.
아마 한동안 다녔던 일터와 죽은 아이 생각에 서문시장 일대를 배회했던것 같다.
그때만 해도 인심이 좋아 밥도 얻어먹을수 있었다 한다.
요즘 같지않아 수용소로 데려갈 사회 보호 시설도 없었던터라 경찰도 그냥 보고
방관만 했던것 같다.
금달래는 항상 검은 치마와 흰 저고리에 검정 고무신을 신고 머리엔 비녀를 
찌르고 옷보따리 같은 뭉치를 옆구리에 끼고 다녔다 한다. 
사람들은 한국 여인의 전통복장을 한 모습을 떠올리고 있다.
또 달서천 하천(달성공원 옆으로 흐르는)에서 빨래도 하고 몸도 싰었다고 한다.
미친 몇년동안은 항상 정신이 나간 상태가 아니고 종종 발작증세를 보였다고
하며 그때마다 옷을 벗어던지고 돌을 주워 중요부분을 자해했다고 한다.
어른들은 어망을 깬다고 했다.  아마 색기가 발동하여 자해하며 성충동을 
눌렀다고들 한다.
내 친구중에는 금달래가 살고 있던 움막집과 가까워 종종 업혀 다녔던 기억을 
하며 부친이 경영했던 서문시장 가게로 종종 놀러와 귀여워 해 줬다고 한다.
금달래는 지나가는 사람들, 특히 말쑥하게 차려입은 신사들을 보면 그 앞에서 
희죽 거리며 자주 치마를 훌러덩 벗어 알몸을 시위하기도 하고, 또 예쁘게 양장 
차림을 한 여자들이 걸어가면 달려가서 머리체를 흔들기도 했다한다.
그러나 서문시장 상인들 한테는 절대로 피해를 주지 않았다고 전한다.
갓쓰고 지나가는 어른을 보면 그 앞에 가서 큰절을 하기도 했단다.
아마 뭔가는 모를 금달래 잠재의식속의 남자와 여자에 대한 한이 아니었을까...
돌아다니는 지역이 한때는 중앙통(로) 까지도 진출했다고 하지만 대신동 일대에
주로 돌아다니며 서문시장 상점 가판대에서 잠을 잤다고 한다.
금달래를 불상히 여겨 이 일대에서 장사하던 사람들이 밥도 사주고 헌옷도 입혀 
주었단다. 
해방전 부터 6.25 까지 이렇게 살아왔던 금달래를 휴전후 얼마간 까지도 대신동 
일대를 배회했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10여년 가까운 노숙, 거렁뱅이 같은 생활이 금달래의 건강이 악화되어
소식도 없이 행려병자로 죽었지 않아나 하고 추측하고 있다.
그 후로 금달래는 사람들 기억속에서 사라져 간다.
그러나 그 일화는 아직도 나이든 분들한테는 이야기 거리로 남아있다.
한때는 아이들이 칭얼대며 울면 "금달래 온다" 하며 겁주기도 했단다.
지금도 "금달래 같은 년"하며 욕하는 사람(70세 이상)들도 있다.
해방을 전후로 해서 한때를 살아왔던 금달래는 "달구벌 축제" 가장행렬 속에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이다.
암울했던 한시대를 대신동 일대에서 우리들 입에 오르내렸던 금달래를 지금은 
아무도 찾지를 않는다.
이 조사를 하러 달성공원 앞에 나이든(80세 전후) 어르신들을 만나니 그때의 금달래 
모습을 떠올리시는지 모두들 허허롭게 웃으신다.
나보고 "자네들도 아는가? 참, 그때가 좋았던 시절이야" 하신다.